멸문 전날, 배신자가 죽었다
2화. 구한 순간, 배신자가 되다
4장. 믿어야 할 사람
서진하는 시체를 그대로 두고 사부에게 달려갔다. 백도현의 죽음을 숨기면 범인에게 시간을 주는 셈이었다.
그가 운기하며 향의 흐름을 살피는 사이, 약당주가 먼저 경비대를 불러 시체와 제자패를 수습한 모양이었다. 장문인 집무실 앞에는 이미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약당주와 내무 장로, 경비대주가 심각한 얼굴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사부 유정문은 중앙에 앉아 있었다. 열일곱 해 만에 보는 젊은 얼굴이었다.
“외문 제자 서진하, 백도현을 살해한 혐의로 검을 내려놓아라.”
내무 장로의 첫마디였다.
서진하는 멈추지 않고 기름종이와 쪽지를 꺼냈다.
“백 사형은 독침과 망혼초에 당했습니다. 오늘 저녁 연무장의 향로를 조사해야 합니다.”
“네 제자패가 시체의 손에서 나왔다.”
“저도 이유를 모릅니다.”
“어젯밤 그를 만났느냐?”
“기억에 없습니다.”
주변에서 헛웃음이 터졌다.
그때 약당주가 한 걸음 나왔다. 희끗한 수염과 부드러운 눈매를 가진 그는 서진하가 어릴 때부터 다치면 치료해주던 사람이었다.
“진하의 맥이 흐트러져 있습니다. 과로로 기억이 혼란스러울 수도 있으니 먼저 치료를—”
그의 소매에서 은은한 단내가 풍겼다.
서진하의 경맥 속 이질적인 기운이 꿈틀거렸다.
의심이 목까지 치밀었지만, 약당주가 망혼초를 썼다는 증거는 없었다. 향을 다루는 사람이라 냄새가 밴 것일 수도 있었다. 성급히 지목했다가는 유일한 기회마저 잃는다.
사부 유정문이 손을 들었다.
“한 시진을 주겠다.”
“장문인!”
“진하가 도망칠 생각이었다면 이곳에 제 발로 오지 않았을 것이다. 한 시진 안에 향이 위험하다는 증거를 가져와라. 그렇지 못하면 네 검과 신분을 거두겠다.”
내무 장로가 거세게 반발했지만 유정문은 시선을 거두지 않았다.
“제가 거짓말을 하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서진하는 일부러 말했다. 사부에게 판단을 강요하고 싶지 않았다. 전생에서 자신이 믿었던 기억조차 틀렸다면, 지금의 확신도 온전하다고 장담할 수 없었다.
“그럴 수도 있겠지.”
유정문이 조용히 답했다.
“하지만 거짓말을 하는 사람은 대개 자기에게 유리한 말을 고른다. 너는 백도현의 시체에서 네 제자패가 나왔다고 먼저 밝혔다. 자신이 기억을 잃었다는 말도 숨기지 않았고.”
“그것만으로 저를 믿으십니까?”
“믿는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확인할 기회를 주는 것이다.”
유정문의 눈매가 아주 조금 부드러워졌다.
“그리고 나는 십 년 동안 네가 허드렛일을 하는 모습을 봤다. 사람은 큰일보다 매일 반복하는 작은 일에서 본성이 드러나는 법이다. 네가 겁은 많아도 동료를 팔아 목숨을 구할 놈은 아니다.”
서진하는 고개를 들 수 없었다.
전생의 자신은 사부가 마지막까지 자신을 의심했다고 믿었다. 그래서 돌아오지 못했다. 사부의 기대를 배신했다는 죄책감과, 사부에게 버림받았다는 원망을 동시에 품고 살았다.
그런데 지금의 사부는 모두가 의심하는 자리에서 그에게 시간을 주고 있었다.
어쩌면 열일곱 해 동안 미워했던 것은 사람들이 아니라, 자신이 만들어낸 거짓 기억이었을지도 몰랐다.
서진하는 무릎을 꿇었다.
“반드시 가져오겠습니다.”
집무실을 나오자 윤하린이 기다리고 있었다.
“저도 갈게요.”
“안 된다.”
“백 사형과 만난 걸 본 사람이 필요하잖아요.”
서진하는 그녀를 밀어내려 했다. 전생에서 혼자 움직이는 데 익숙했다. 누군가 곁에 있으면 약점이 됐다. 자신 때문에 하린이 다시 죽는 모습을 볼 자신도 없었다.
그러나 하린은 검을 뽑아 그의 앞을 막았다.
“사형은 늘 혼자 해결하려고 해요. 그래서 어젯밤에도 사부님 심부름을 혼자 갔잖아요.”
“무슨 심부름?”
“장가촌에 옥패를 전하러 갔잖아요. 새벽에 돌아오는 것도 봤어요.”
서진하는 품을 뒤졌다.
죽을 때 깨졌던 회명옥이 멀쩡한 채 들어 있었다.
사부의 명령. 장가촌. 백도현과의 만남. 그 뒤에 지워진 기억.
모든 것이 멸문 전날부터 시작됐다.
“좋아. 대신 내 눈앞에서 벗어나지 마라.”
하린이 처음으로 웃었다.
“그 말, 제가 하려고 했는데요.”
5장. 처음으로 바꾼 죽음
연무장의 향로는 저녁 집회 직전에 약당의 잡역부가 교체한다. 전생에서 그 일을 맡았던 소년은 멸문 첫날 시체로 발견됐다. 이름조차 기억하지 못했지만 죽은 위치는 기억했다.
서진하와 하린은 후문으로 향했다. 사부가 준 한 시진 중 이미 절반이 흘러 있었다.
해가 산등성이에 걸릴 무렵, 어린 잡역부 하나가 천으로 감싼 향통을 들고 나타났다. 소년은 주변을 몇 번이나 살피며 떨고 있었다.
서진하는 길을 막았다.
“그 안에 무엇이 들었지?”
소년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평, 평소 쓰는 안정향입니다.”
“거짓말하지 마. 네 누이를 잡고 협박했나?”
전생에 흑천회가 하수인을 쓰는 방식은 늘 같았다. 약점이 없다면 만들고, 가족이 없다면 빚을 지게 했다.
소년의 눈에서 눈물이 떨어졌다.
“누이만 살려준다고 했습니다.”
그 순간 대숲에서 바람 가르는 소리가 났다.
서진하는 소년을 밀쳤다. 검은 침이 방금 전까지 소년의 목이 있던 자리에 박혔다.
검은 옷의 사내가 대숲에서 뛰쳐나왔다. 일류에는 미치지 못해도 이류 상단의 무사였다. 삼류인 서진하가 정면으로 상대할 수 있는 자가 아니었다.
첫 합에 검이 튕겨 나갔다. 손목이 저렸다. 두 번째 칼날은 목을 노렸다.
하린의 검이 옆에서 끼어들었다. 그녀는 서진하보다 경지가 높았지만 실전 경험이 부족했다. 사내가 허초를 섞자 그대로 중심이 흔들렸다.
“왼쪽 세 걸음!”
서진하의 외침에 하린이 몸을 날렸다.
칼날이 그녀의 소매만 갈랐다.
서진하는 역류심법을 운용했다. 사내의 내공이 팔에서 어깨로, 어깨에서 단전으로 돌아가는 흐름이 희미하게 느껴졌다. 강한 무공일수록 다음 동작을 위한 호흡이 필요했다. 열일곱 해 동안 수없이 맞고 달아나며 배운 사실이었다.
사내가 세 번째로 발을 내디딘 순간 호흡이 끊겼다.
“지금!”
하린의 검이 사내의 어깨를 꿰뚫었다.
서진하는 바닥의 흙을 걷어차 시야를 가리고, 부러진 향통을 사내의 입에 밀어 넣었다. 사내가 본능적으로 숨을 참는 찰나, 검자루로 목 뒤를 내리쳤다.
사내가 무릎을 꿇었다.
화려한 승리는 아니었다. 검 한 번 제대로 이기지 못한 삼류 무사의 싸움이었다. 하지만 전생에서는 죽었던 소년이 살아서 울고 있었다.
소년의 이름은 동백이었다. 열세 살에 문파로 들어와 약당의 불을 지피고 물을 나르는 아이였다. 서진하는 이름을 듣는 순간 전생의 장면을 떠올렸다. 후문 옆 배수로에 얼굴을 반쯤 담근 작은 시체. 당시 그는 추격을 피해 달아나며 그 아이의 허리에서 식량 주머니를 떼어갔다. 살아남기 위해서였다고 수없이 합리화했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시체의 이름조차 알려 하지 않았다.
“누이는 어디에 있지?”
동백이 울음을 삼키며 대답했다.
“산 아래 폐사당에 잡혀 있습니다. 향통을 연무장에 두면 해 질 무렵 풀어준다고 했습니다.”
“그 말을 믿었느냐?”
“안 믿었습니다. 그래도 제가 거절하면 바로 죽인다고 해서….”
하린이 아이의 어깨를 감쌌다. 서진하는 포박한 사내를 내려다보았다. 사내의 신발에는 붉은 흙이 묻어 있었다. 하령산 북쪽 폐사당으로 가는 길의 흙이었다. 동백의 누이가 아직 살아 있을 가능성이 있었다.
사내의 품에서는 망혼초가 섞인 교란향과 문파 내부 구조도가 나왔다. 구조도 한쪽에는 약당에서 약재를 분류할 때 쓰는 세 잎 문양이 찍혀 있었다. 약당주만이 아니라 약당에 드나드는 이라면 누구나 손댈 수 있는 공동 인장이었다.
시간은 반 시진도 남지 않았다. 지금 산을 내려가면 증거를 사부에게 가져갈 수 없다. 증거를 먼저 가져가면 아이의 누이는 죽을 수 있다.
전생이라면 고민하지 않았을 것이다. 더 많은 사람을 구한다는 명분으로 한 사람을 포기했을 것이다. 그렇게 한 명씩 포기하다가 결국 누구도 구하지 못했다.
서진하는 곽칠성에게 보낼 전서를 적어 하린에게 건넸다.
“곽 사형에게 전해. 외문 제자 다섯을 데리고 북쪽 폐사당으로 가라고. 흑천회가 기다리고 있을 테니 정면으로 들어가지 말고 뒤편 배수로를 쓰라고 해.”
“사형은요?”
“나는 이자를 장문인께 데려간다. 너는 동백이와 함께 곽 사형을 안내해.”
하린이 고개를 저었다.
“눈앞에서 벗어나지 말라고 했잖아요.”
“그래서 부탁하는 거다. 예전의 나는 늘 혼자 살아남으려 했지만, 이번에는 혼자서 모두를 구할 수 없어.”
낯선 말이었지만 하린은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잠시 그를 바라보다 전서를 받아 들었다.
“누이까지 구하고 연무장으로 갈게요. 그러니까 사형도 잡혀가지 마요.”
“약속하마.”
서진하는 그 약속이 얼마나 무거운지 알고 있었다.
과거가 바뀌었다.
처음으로 누군가를 살렸다.
하린이 그의 팔을 붙잡았다.
“사형, 웃고 있어요.”
서진하는 그제야 자신의 입꼬리가 올라가 있음을 알았다.
하린은 동백의 손을 잡고 산길로 사라졌다. 서진하는 반대편, 연무장으로 이어지는 길을 향해 사내를 끌고 걸음을 옮겼다.
6장. 새로운 배신자
서진하는 포박한 사내를 혼자 끌고 연무장으로 돌아왔다. 사부가 준 한 시진이 거의 다 되어가고 있었다.
그러나 분위기가 이상했다.
제자들이 원형으로 모여 있었고, 중앙에는 흰 천으로 덮인 시체가 놓여 있었다. 백도현이었다. 약당주의 지시로 경비들이 폐창고에서 먼저 옮겨온 모양이었다.
사부와 장로들이 시체 옆에 서 있었다.
“암살자를 잡았습니다.”
서진하가 향통과 구조도를 내밀었다.
“오늘 밤 이 향으로 모두의 내공을 흩뜨리려 했습니다.”
내무 장로가 구조도를 받아 들었다. 제자들 사이에서 술렁임이 퍼졌다.
“이것도 보셔야 합니다.”
내무 장로가 백도현의 품에서 나온 서신을 펼쳤다.
백도현은 자시 전에 산문 열쇠를 서진하에게 넘긴다. 서진하가 후문을 열면 안팎에서 동시에 진입한다.
서진하의 이름 아래에는 자신의 수결까지 찍혀 있었다.
“위조입니다.”
“그렇다면 네 제자패가 왜 백도현의 손에 있었지?”
대답할 수 없었다. 이 정도로 필체와 인장을 흉내 내려면 문파의 서체를 오래 다룬 사람이어야 했다. 규율패와 서고를 관리하는 내무 장로라면 낯선 재주는 아니었다. 경비대주 또한 오늘따라 유독 후문 순찰조를 서쪽으로 몰아두었다고 들었다. 우연이라기엔 절묘했지만 지금은 누구도 확신할 수 없었다.
“어젯밤 백도현을 만나지 않았다고 했느냐?”
“기억에는 없습니다.”
그때 산길 쪽에서 어린 외문 제자 하나가 숨을 몰아쉬며 뛰어들었다.
“곽 사형이 전하랍니다! 폐사당 뒷문을 뚫었고, 윤 소저가 누이를 데리고 나오는 중이랍니다. 다만 흑천회 잔당이 더 있어 시간이 좀 걸릴 것 같다고—”
아이는 숨을 고르다 내무 장로 쪽을 보고 덧붙였다.
“그리고 윤 소저가, 어젯밤 서 사형과 백 사형이 폐창고 쪽에서 함께 있는 걸 봤다고 장문인께 꼭 전해달라 했습니다. 둘이 다투는 모습은 아니었다고요.”
“그 말이 사실인지는 본인이 와서 말해야 하지 않겠느냐.”
내무 장로가 냉소했다.
“지금은 옆에 없으니 확인할 길이 없다.”
제자들의 시선이 다시 서진하에게 몰렸다.
그 순간 포박된 사내가 몸을 떨었다.
“누가 시켰느냐?”
서진하가 멱살을 잡았지만 사내의 입에서 검은 피가 쏟아졌다. 혀 밑의 독낭이 터진 것이 아니었다. 조금 전까지 멀쩡했던 맥이 갑자기 끊어졌다.
사내의 입에서 단내가 났다.
교란향과 다른 냄새. 독의 발작을 늦추는 약당의 해독환이었다. 정해진 시간이 지나면 오히려 심장을 멎게 하는 배합.
서진하가 고개를 들었다.
약당주는 군중 뒤에서 부상자들을 살피고 있었다.
“어젯밤 백도현을 만나지 않았다고 했느냐?”
내무 장로가 다시 물었다.
“기억에는 없습니다.”
“그 뒤 백도현은 죽었고, 서진하는 기억이 없다고 한다.”
제자들의 시선이 변했다.
전생과 똑같은 눈빛이었다. 의심, 두려움, 경멸.
서진하의 머릿속에서 통증이 폭발했다.
향 냄새가 짙어졌다.
사라졌던 어젯밤의 장면이 번개처럼 되살아났다.
백도현이 피를 흘리며 그의 손목을 붙잡고 있었다. 제자패가 백도현의 손 안에서 깨졌다. 누군가 창고 밖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진하야, 잘 들어.”
이번에는 목소리가 들렸다.
“네 기억을 믿지 마라. 돌판 밑의 것은 내가 지켰다.”
백도현이 피 묻은 손으로 그의 가슴을 밀어 문밖으로 내보냈다.
“문을 연 건 네가 아니야.”
장면이 끊겼다.
현실로 돌아온 서진하의 코끝에 은은한 단내가 스쳤다.
군중 뒤에서 약당주가 향로에 불을 붙이고 있었다.
아직 저녁 집회 전이었다.
그런데 연무장에 모인 제자들의 눈동자가 하나둘 흐려지고 있었다.
다른 이들과 달리 서진하의 정신은 여전히 맑았다. 낮에 삼킨 환약 때문인지, 역류심법으로 열어둔 감각 때문인지는 알 수 없었다.
서진하는 검을 뽑았다.
“향로에서 떨어져!”
사부가 자리에서 일어났고, 장로들이 동시에 검을 겨눴다. 그러나 그 검끝이 향로가 아니라 서진하를 향했다.
약당주가 안타까운 얼굴로 말했다.
“역시 망상만이 아니었구나. 진하가 주화입마에 빠졌다.”
서진하는 그제야 알았다.
전생의 멸문은 내일 시작된 것이 아니었다.
이미 오늘 아침, 자신이 눈을 뜨기 전부터 시작돼 있었다.
그리고 이번 생에서 첫 번째 배신자로 몰린 사람은 백도현이 아니었다.
바로 서진하 자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