멸문 전날, 배신자가 죽었다

1화. 내가 기억하는 과거는 거짓이었다

프롤로그. 열일곱 해 뒤의 밤

불길은 하령산의 폐허를 대낮처럼 밝히고 있었다.

한때 하령검문의 산문이었던 돌기둥이 열기에 갈라졌다. 무너진 현판 아래에는 오래전에 말라붙은 핏자국이 검게 남아 있었다. 열일곱 해가 지났는데도 서진하는 그날의 냄새를 기억했다. 젖은 재, 타버린 소나무, 피비린내.

그리고 자신을 바라보던 사매의 마지막 눈빛.

“여기까지 도망쳐 올 줄은 몰랐군.”

검은 복면을 쓴 무인이 불길 너머에서 걸어 나왔다. 그의 소매에는 밤하늘을 가르는 세 줄의 은빛 자수, 흑천회의 표식이 박혀 있었다.

서진하는 부러진 검을 지팡이처럼 짚고 간신히 일어섰다. 옆구리의 상처에서는 피가 멎지 않았다. 이미 세 명을 베었다. 열일곱 해 전, 하령검문의 삼류 제자였던 자신이라면 상상도 못 했을 일이었다. 그동안 도망치며 익힌 것은 무공만이 아니었다. 살아남는 법, 사람을 속이는 법, 그리고 자신보다 강한 자의 목을 물어뜯는 법도 배웠다.

그럼에도 여기까지였다.

“백도현은 배신자가 아니었지?”

복면인의 걸음이 멈췄다.

서진하는 그 짧은 멈춤만으로 대답을 들었다.

평생을 쫓았던 이름. 산문의 열쇠를 적에게 넘기고, 동료들을 죽음으로 몰았다고 알려진 사형. 그 이름 하나를 증오하며 버텼다. 그런데 사흘 전 흑천회의 장부에서 찾은 기록에는 전혀 다른 문장이 적혀 있었다.

하령검문 내부 고발자 백도현, 멸문 전 제거 완료.

“누가 내 기억을 바꿨지?”

복면인은 대답하지 않았다. 검끝이 서진하의 가슴을 향했다.

“삼류 무사 하나가 너무 많은 것을 알았다.”

검광이 번뜩였다.

서진하는 피하지 않았다. 피할 힘도 없었다. 차가운 칼날이 가슴을 꿰뚫는 순간, 품속의 옥패가 뜨겁게 달아올랐다. 사부가 멸문 전날 건네주었다고 믿었던 낡은 옥패였다. 아니, 정말 그날 받은 것이 맞았던가.

의식이 꺼지기 직전, 기억에 없던 목소리가 들렸다.

“진하야. 네가 도망친 것이 아니다.”

사부의 목소리였다.

“내가 너를 보냈다.”

그 순간 옥패가 깨졌다.

서진하의 세상이 붉게 뒤집혔다.

1장. 죽은 사람들의 아침

“사형! 언제까지 잘 거예요?”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서진하는 눈을 떴다.

검에 찔린 가슴이 타는 듯 아팠다. 그는 본능적으로 몸을 일으키며 손을 뻗었다. 하지만 손에 잡힌 것은 부러진 검이 아니라 낡은 목침이었다.

좁은 방. 종이 창호. 벽에 걸린 외문 제자복. 창틀 위에서 연기를 피우는 모기향.

모든 것이 낯설 만큼 익숙했다.

문이 벌컥 열리고 한 소녀가 얼굴을 내밀었다. 검은 머리를 짧게 잘라 턱선에 맞춘 스물 안팎의 여인이었다. 허리에 찬 검보다 손에 든 대나무 바구니가 더 어울리는 차림이었다.

“해가 중천이에요. 오늘도 점심 당번 빼먹으면 제가 사부님께—”

여인이 말을 멈췄다.

서진하는 자신도 모르게 그녀의 손목을 붙잡고 있었다.

“윤하린.”

“왜, 왜 그래요?”

살아 있었다.

불타는 연무장 한복판에서 가슴에 화살을 맞고 쓰러졌던 사매가, 따뜻한 체온과 맥박을 가진 채 눈앞에 서 있었다.

서진하는 입술을 떼었지만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열일곱 해 동안 수백 번 미안하다고 말했다. 꿈속에서, 술에 취해서, 추격자에게 쫓겨 절벽 아래 숨어서. 하지만 살아 있는 그녀 앞에서는 그 흔한 한마디조차 할 수 없었다.

“사형, 악몽 꿨어요?”

하린이 바구니에서 찐빵 하나를 꺼내 내밀었다.

“일단 이거라도 먹어요.”

서진하는 찐빵을 받았다. 손바닥이 뜨거웠다. 그 사소한 온기가 가슴에 박힌 칼날보다 아팠다.

그는 방을 둘러보다 벽에 걸린 달력을 발견했다. 하령력 이백십칠 년, 칠월 초이틀.

멸문 전날이었다.

서진하는 창밖을 보았다. 맑은 하늘 아래 하령검문의 회색 기와들이 층층이 이어졌다. 연무장에서는 외문 제자들이 목검을 부딪치고, 식당 굴뚝에서는 흰 연기가 올랐다. 죽었던 백여 명의 사람들이 아무것도 모른 채 하루를 시작하고 있었다.

“지금 시각이?”

“사시 말이에요. 정말 어디 아픈 거 아니에요?”

멸문까지 열두 시진 남짓.

전생의 기억에 따르면 오늘 밤 백도현이 산문의 열쇠를 훔쳐 흑천회의 첩자에게 넘긴다. 내일 사시, 외부 순찰대가 자리를 비운 순간 산문이 열린다. 우물에 독이 풀리고, 제자들의 내공이 흐트러진 사이 학살이 시작된다.

백도현만 막으면 된다.

이번에는 아무도 죽게 두지 않는다.

서진하는 찐빵을 손에 쥔 채 방을 나와 연무장을 가로질렀다. 발걸음을 재촉해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자꾸만 주위로 시선이 갔다.

검을 휘두르다 사형에게 꾸중을 듣는 막내 제자, 장작을 지고 가며 투덜대는 식당 노인, 빨랫줄에 도복을 널다 말고 하늘을 살피는 침방 아주머니. 전생의 그날에는 이름조차 떠올리지 못했던 사람들이었다. 멸문 뒤에는 모두 시체로만 기억했다. 어떤 이는 얼굴이 타서 알아보지 못했고, 어떤 이는 끝내 찾지 못했다.

“진하야, 비켜라!”

커다란 장작더미가 다가왔다. 짐을 든 외문 사형 곽칠성이 어깨로 그를 밀치고 지나갔다.

“낮잠을 얼마나 잤기에 넋이 나갔어? 저녁 수련 때 또 쓰러지면 내가 업어다 주지 않는다.”

곽칠성은 내일 새벽 식당 앞에서 발견된다. 등에 깊은 도흔이 세 개나 있었고도 어린 제자 둘을 품에 감싸고 있었다. 서진하는 그 시체를 외면하고 도망쳤다.

“곽 사형.”

“왜?”

“오늘 저녁에는 어린 제자들을 데리고 후원으로 가지 마십시오.”

“갑자기 무슨 소리야?”

“부탁입니다.”

곽칠성이 미간을 찌푸렸지만, 서진하의 얼굴을 보더니 장난스러운 표정을 거두었다.

“알았다. 대신 나중에 이유는 말해.”

그 짧은 대답에 서진하는 목이 메었다. 전생의 자신은 이 사람들을 약하다고 생각했다. 강한 적이 오면 누구나 제 목숨부터 챙길 것이라고 믿었다. 하지만 마지막까지 도망친 사람은 자신이었고, 약하다고 여긴 이들은 서로를 지키다 죽었다.

약당 앞을 지날 때 낯익은 목소리가 그를 불러 세웠다.

“진하야, 안색이 반쪽이구나.”

약당주였다. 희끗한 수염 아래 온화한 눈매가 그를 살피고 있었다. 소매 안에서 은은한 단내가 풍기는 작은 환약이 나왔다.

“심장이 놀란 사람에게 좋은 약이다. 챙겨 먹어라.”

서진하는 얼떨결에 환약을 받아 품에 넣었다. 익숙한 단내였지만 어디서 맡았는지는 떠오르지 않았다.

회귀했다고 해서 열일곱 해의 죄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이번 하루로 모든 사람을 구할 수 있을지도 알 수 없었다. 그래도 한 사람씩, 기억나는 죽음부터 바꿔야 했다.

그는 다시 하린이 기다리는 곳으로 돌아왔다.

“하린아.”

서진하는 찐빵을 내려놓고 검을 집었다.

“사부님께는 내가 곧 찾아뵙겠다고 전해. 먼저 만날 사람이 있다.”

“누구요?”

“백도현 사형.”

하린의 표정이 이상하게 굳었다.

“백 사형을 왜 또 만나요?”

“또라니?”

“어젯밤에도 둘이 폐창고 쪽으로 가는 걸 봤는데.”

서진하의 손이 멈췄다.

그에게는 그런 기억이 없었다.

2장. 먼저 죽은 배신자

백도현은 내문 제자였지만 사람들의 눈을 피해 폐창고를 자주 이용했다. 전생의 서진하는 멸문 후에야 그 사실을 알았다. 흑천회의 연락책을 만나기 위한 장소라고 믿었다.

창고는 문파 북쪽, 약당 뒤편의 대숲에 가려져 있었다.

문은 안에서 잠겨 있었다.

서진하는 주변을 살폈다. 창문 밑 진흙에 끌린 자국이 있었고, 문틈에서는 가느다란 피가 흘러나와 먼지와 엉겨 붙어 있었다.

그는 어깨로 문을 밀어 경첩을 부쉈다.

피비린내보다 먼저 단내가 코를 찔렀다. 약당에서 부상자를 치료할 때 피우는 안정향과 비슷했다.

창고 안에는 백도현이 앉아 있었다.

정확히는 곡식 자루에 등을 기댄 채 죽어 있었다.

입술은 검푸르게 변했고, 양손의 손톱은 부러져 있었다. 목에는 가느다란 붉은 선이 한 바퀴 둘러져 있었다. 바닥에는 검이 떨어져 있었지만 칼집에서 뽑힌 흔적조차 없었다.

서진하는 천천히 다가가 손등을 만졌다. 차가웠다. 사망한 지 한두 시진은 넘었다. 자신이 눈을 뜨기 전부터 죽어 있었을 가능성이 컸다.

“이게 어떻게….”

전생에서 백도현은 내일 아침 산문을 열었다고 알려졌다. 장로들의 증언도, 살아남은 잡역부의 증언도 같았다. 그런데 지금 시체가 되어 있다면 내일의 산문은 누가 열었는가.

회귀 때문에 바뀐 것이 아니었다.

처음부터 그가 아는 과거가 거짓이었다.

백도현의 오른손이 무언가를 움켜쥐고 있었다. 손가락을 펴자 푸른 나무 조각이 떨어졌다. 하령검문 외문 제자에게 지급되는 제자패의 귀퉁이였다.

서진하는 허리춤의 제자패를 꺼냈다.

오른쪽 아래가 깨져 있었다.

두 조각은 정확히 맞아떨어졌다.

하린의 말이 떠올랐다.

어젯밤에도 둘이 폐창고 쪽으로 가는 걸 봤는데.

서진하는 어젯밤 잠자리에 든 것까지 분명히 기억했다. 백도현을 만난 기억은 없었다. 제자패가 깨진 기억도 없었다.

머릿속에서 날카로운 통증이 터졌다.

희미한 장면이 번쩍였다. 어두운 창고. 피를 흘리는 백도현. 자신의 손목을 붙잡는 손.

그러나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서진하는 벽을 짚고 숨을 골랐다. 도망쳐서는 안 됐다. 전생의 그는 매번 의심스러운 흔적을 보면 살아남는 쪽을 택했다. 그 결과 열일곱 해를 살았지만, 아무도 구하지 못했다.

이번에는 달라야 했다.

그는 시체를 살폈다. 검상은 없었다. 목의 붉은 선은 밧줄 자국이었지만 직접적인 사인은 아니었다. 입안에서는 쓴 냄새가 났다. 혀 밑에 작은 침 자국이 있었다.

독침으로 몸을 마비시킨 뒤 목을 졸랐다.

백도현의 손톱 밑에는 검푸른 가루가 끼어 있었다. 하령산에서 나는 약재가 아니었다. 하지만 서진하는 그 냄새를 알고 있었다. 도피 생활 중 흑천회의 고문방에서 맡았던 망혼초였다. 정신을 흐리고 짧은 기억을 지우는 약재.

그 순간 창고 밖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서진하는 반사적으로 몸을 숨겼다.

문 앞에 선 사람은 약당주였다.

“진하야? 안에 있느냐?”

평소와 다름없는 온화한 목소리였다.

3장. 기억에 없는 비급

서진하는 대답하지 않았다.

약당주의 그림자가 문틈 아래에 잠시 머물렀다. 이윽고 발소리가 멀어졌다. 쫓아가 확인하고 싶었지만 지금은 증거가 먼저였다.

백도현의 몸은 기묘하게 비스듬히 놓여 있었다. 죽은 뒤 쓰러진 자세라기보다 누군가 억지로 앉혀둔 것 같았다. 눈동자는 바닥 한쪽을 향해 있었다.

서진하는 그 시선을 따라갔다.

금이 간 돌판 하나가 보였다. 틈에 손가락을 넣어 들어 올리자 기름종이로 감싼 얇은 책자와 쪽지가 나왔다.

책자 표지에는 네 글자가 적혀 있었다.

역류심법 잔편.

하령검문의 창고에서 평생 잡역을 했지만 처음 보는 이름이었다. 첫 장을 넘기자 호흡을 거꾸로 짚어 기운의 흐름을 읽는 구결이 적혀 있었다. 내공을 늘리는 정통 심법이 아니라, 몸 안에 들어온 이질적인 기운을 찾아내는 감응법에 가까웠다.

쪽지에는 더 짧은 문장만 남아 있었다.

우물은 미끼다. 향을 막아라.

서진하는 전생의 멸문 날을 떠올렸다. 모두가 우물에 독이 풀렸다고 믿었다. 물을 마신 제자들이 힘을 잃었고, 사부와 장로들도 운기할 때마다 피를 토했다.

그러나 이상한 점이 있었다. 물을 마시지 않은 경비조차 쓰러졌다. 당시에는 공기 중에 퍼진 독이라고 여겼지만, 쪽지가 사실이라면 원인은 따로 있었다.

연무장의 향로.

하령검문은 매일 저녁 수련을 마치고 약당에서 만든 안정향을 피웠다. 상처 입은 근육을 풀고 내공의 주화를 막는다는 이유였다. 문파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 향을 들이마셨다.

서진하는 역류심법의 첫 구결을 따라 숨을 들이켰다. 단전의 미약한 기운을 거꾸로 끌어올리자 온몸의 경맥이 바늘로 찌르는 듯 아팠다. 삼류에 머문 몸으로 감당하기에는 거친 운기였다.

곧 가슴 한쪽에서 낯선 기운이 느껴졌다.

아주 가늘고 달콤한 냄새를 가진 기운이 머리로 올라가고 있었다.

이미 자신도 향에 중독돼 있었다.

고통과 함께 기억이 다시 번쩍였다.

어젯밤, 사부의 방.

사부가 작은 옥패를 그의 손에 쥐여주고 있었다.

“산 아래 장가촌으로 가거라. 누구에게도 말하지 마라.”

다음 장면에서는 자신이 백도현과 폐창고에 있었다.

“역류심법은 이 돌판 밑에 숨겼다.”

백도현이 갈라진 돌 틈을 가리키며 낮게 말했다.

“내가 직접 사부께 가져가마. 너는 아무것도 못 본 걸로 해.”

그 뒤는 검은 안개처럼 끊겨 있었다.

서진하는 피를 토하며 운기를 멈췄다. 하지만 흐려졌던 정신은 전보다 선명했다. 단전의 기운도 아주 조금 굵어져 있었다. 무공의 경지가 크게 오른 것은 아니었다. 다만 이전에는 느끼지 못하던 흐름이 보였다.

누군가 그의 기억을 지웠다.

그리고 오늘 밤, 문파 전체에 같은 짓을 하려 한다.

멸문까지 이제 열 시진 남짓. 사부에게 이 사실을 알려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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